
리스트 이야기
1840년대 유럽의 연주회장. 긴 머리의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오르면 객석이 술렁이고, 연주가 끝나면 사람들이 그가 남긴 장갑이나 손수건을 차지하려 다투었다고 전합니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 열광에 '리스토마니아'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프란츠 리스트입니다.
헝가리의 신동
리스트는 1811년 헝가리 라이딩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에서 일하던 관리인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였어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아홉 살 소년의 연주회를 열어 귀족들의 후원을 얻었고, 가족은 빈으로 옮겼습니다. 리스트는 그곳에서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어요.
파리와 파가니니
열두 살 무렵 리스트 가족은 파리로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십 대 중반에 아버지를 잃고 한동안 깊은 방황에 빠지기도 했어요. 1832년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은 스무 살의 리스트는 피아노로 그런 경지에 오르겠다고 마음먹고 혹독하게 연습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 함께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몇 해를 지내며 세 아이를 두었습니다. 그 가운데 둘째 딸 코지마는 훗날 지휘자 뷜로와 결혼했다가, 리스트의 친구 바그너의 아내가 되었지요.
순회 연주의 시대
1839년부터 여덟 해 가까이 리스트는 유럽 곳곳을 돌며 수백 번의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피아노 한 대로 혼자 무대를 채우는 '독주회'라는 형식을 자리 잡게 한 사람으로도 꼽혀요. 그는 번 돈의 많은 부분을 자선과 공공사업에 내놓았습니다. 본에 베토벤 기념비를 세우는 데에도 큰돈을 보탰지요. 존경하던 선배를 기리는 일에 앞장선 것이에요.
바이마르의 음악 감독
1848년 리스트는 화려한 연주 생활을 접고 독일 바이마르의 궁정 음악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초연하는 등 새로운 작곡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렸어요. 스스로도 시나 그림 같은 이야기를 관현악으로 그리는 '교향시'라는 새 형식을 열었습니다. 정해진 악장의 틀 대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하나의 주제가 모습을 바꿔 가며 곡을 이끄는 방식이었어요. 이 생각은 뒤 세대의 많은 작곡가에게 이어졌습니다.
로마의 수도자
1860년대 리스트는 로마로 옮겨 가 가톨릭의 하급 성직을 받았고, 그 뒤 '아베 리스트'라 불리며 수도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로마와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오가며 수많은 젊은 피아니스트를 가르쳤어요. 그는 제자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1886년 그는 딸 코지마가 이끌던 바이로이트 축제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일흔넷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음재에서 들을 수 있는 곡
- 「라 캄파넬라」파가니니의 선율을 피아노로 옮긴 작은 종의 노래.
- 「사랑의 꿈」 3번자기 노래를 피아노로 옮긴 서정적인 곡.
화려한 「라 캄파넬라」와 노래하는 「사랑의 꿈」을 이어 들으면, 무대의 스타와 시인을 함께 품었던 리스트의 두 얼굴이 보입니다.
함께한 사람들
- 카를 체르니어린 리스트를 가르친 베토벤의 제자.
- 마리 다구함께 지내며 세 아이를 둔 백작 부인이자 작가.
- 리하르트 바그너리스트가 작품을 초연하며 도운 작곡가이자 훗날 사위.
- 수많은 제자리스트가 돈 받지 않고 가르친 젊은 피아니스트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리스트는 연주로 번 큰돈을 자선과 공공사업에 내놓았고, 말년에는 제자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사회에 무언가를 돌려주는 일은 오늘날에도 자주 이야기되지요.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 사회에 돌려주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사회가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책임일까요?
리스트의 숨은 이야기
같은 시대를 산 작곡가
생애가 리스트의 생애와 10년 넘게 겹친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