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멘델스존 이야기
1825년, 베를린의 한 저택. 일요일마다 이 집 넓은 방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그날 연주된 곡은 현악기 여덟 대를 위한 팔중주. 작곡가는 열여섯 살 소년이었어요. 이 곡은 지금도 실내악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입니다.
학자와 은행가의 집안
멘델스존은 1809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름난 유대인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이었고, 아버지는 은행가였어요. 가족은 곧 베를린으로 옮겼고, 아이들은 개신교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집안은 이름 뒤에 '바르톨디'를 덧붙이기도 했어요. 그 시절 독일 사회에서 유대인이 겪던 차별을 피하려는 선택이었습니다.
일요 음악회
멘델스존 집안은 아이들 교육에 아낌이 없었습니다. 펠릭스와 누나 파니는 음악뿐 아니라 그림, 여러 나라 말, 고전 문학을 배웠어요. 작곡은 괴테의 친구이기도 한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에게 배웠지요. 집에서는 일요일마다 음악회가 열려, 펠릭스는 직접 쓴 곡을 연주자들과 함께 시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열여섯에 팔중주, 열일곱에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을 썼어요.
바흐를 다시 무대로
1829년, 스무 살의 멘델스존은 거의 백 년 동안 제대로 연주되지 않던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베를린에서 지휘했습니다. 공연은 큰 화제가 되었고, 이 일은 바흐 음악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어요.
여행하는 젊은이
그 뒤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이탈리아를 오래 여행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바다는 「헤브리디스」 서곡이 되었고, 이탈리아의 햇빛은 교향곡 '이탈리아'가 되었지요. 그는 그림 솜씨도 좋아 여행지 풍경을 많이 그려 남겼습니다.
라이프치히
1835년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연주회의 질을 크게 높이고, 슈베르트의 '그레이트' 교향곡을 처음 무대에 올리기도 했어요. 1843년에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세워 젊은 음악가들을 길렀습니다. 영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아 열 번 가까이 건너갔고, 1846년 버밍엄에서 오라토리오 「엘리야」를 초연했지요.
이른 끝과 그 뒤
1847년 5월, 평생 가장 가까웠던 누나 파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멘델스존도 그해 11월, 서른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훗날 나치 독일은 그가 유대인 집안이라는 이유로 그의 음악을 금지하고, 라이프치히에 서 있던 그의 동상까지 없앴습니다.
평음재에서 들을 수 있는 곡
- 「헤브리디스」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 「한여름 밤의 꿈」 중 '결혼 행진곡', 무언가 중 '봄의 노래', 현악 사중주 6번.
밝고 단정한 '봄의 노래'와 '결혼 행진곡'을 먼저 듣고, 마지막에 누나를 잃은 해에 쓴 현악 사중주 6번을 들어 보세요. 늘 밝게만 알려진 멘델스존이 마지막에 얼마나 깊은 슬픔을 음악에 담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바다 냄새가 나는 「헤브리디스」와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의 여행과 우정을 들려주지요.
함께한 사람들
- 누나 파니 멘델스존동생 못지않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평생의 첫 청중.
-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작곡을 가르친 스승.
- 페르디난트 다비드바이올린 협주곡을 함께 다듬은 게반트하우스 악장.
- 로베르트 슈만라이프치히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멘델스존 집안은 차별을 피하려 종교와 이름까지 바꾸었지만, 그가 죽은 뒤 나치는 유대인 집안이라는 이유로 그의 음악을 금지하고 동상을 없앴습니다. 출신 때문에 사람과 업적이 지워지는 일은 역사에서 거듭 일어났지요.
출신이나 배경 때문에 지워진 사람들의 이름과 업적을 되찾는 일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책임일까요?
손으로 쓴 악보

멘델스존의 곡
멘델스존의 숨은 이야기
같은 시대를 산 작곡가
생애가 멘델스존의 생애와 10년 넘게 겹친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