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엘가의 초상

작곡가 · 낭만

에드워드 엘가

Edward Elgar

생애
1857–1934
태어난 곳
잉글랜드 로어브로드히스
시대
낭만

엘가 이야기

1888년, 서른한 살의 바이올린 선생이 약혼녀에게 작은 곡 하나를 선물합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짧은 노래, 「사랑의 인사」였어요. 그 무렵 그는 영국 지방 도시에서 레슨으로 생계를 꾸리던 무명의 음악가였습니다. 에드워드 엘가입니다.

악기 가게의 아들

엘가는 1857년 영국 우스터 근처의 시골 마을 브로드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우스터에서 악기와 악보를 파는 가게를 하며 피아노 조율사로 일했고, 교회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했어요. 소년은 가게의 악보를 읽고, 악기를 만지며 음악을 익혔습니다. 정식으로 음악 학교에 다니지는 못했어요. 엘가는 훗날 자신이 거의 혼자 배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지방의 음악가

젊은 엘가는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지역 악단에서 연주하고, 근처 정신 병원 직원들로 꾸린 악단을 지휘하며 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개신교가 주류인 영국에서 가톨릭 신자였고, 장사하는 집안 출신이라는 점도 그를 상류 음악계와 멀게 했지요.

자전거와 시골길

엘가는 우스터 둘레의 언덕과 들판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거나 말번 언덕을 걸으며 곡의 실마리를 얻곤 했다고 전해요. 그는 화학 실험이나 연날리기 같은 엉뚱한 취미도 즐긴, 호기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음악 곳곳에 흐르는 넓고 따뜻한 선율에는 그 언덕의 풍경이 배어 있다고들 하지요.

앨리스

그의 제자였던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는 그보다 여덟 살 많고, 장군의 딸로 높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기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1889년 결혼했어요. 앨리스는 남편의 재능을 굳게 믿고, 악보를 정리하고 살림을 꾸리며 평생 그를 뒷받침했습니다. 「사랑의 인사」는 바로 그녀에게 바친 약혼 선물이었지요.

마흔둘의 성공

1899년, 친구들을 한 사람씩 음악으로 그린 「수수께끼 변주곡」이 런던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엘가는 마흔둘이었어요. 이듬해 오라토리오 「제론티어스의 꿈」을 썼고, 1901년에는 행진곡 「위풍당당」 1번을 내놓았습니다. 이 행진곡의 가운데 선율에는 뒤에 가사가 붙어, 영국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요. 그는 1904년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지방의 바이올린 선생이 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된 것이지요.

전쟁과 그 뒤

제1차 세계 대전은 엘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서식스의 시골 오두막에서 그는 실내악과 첼로 협주곡을 썼어요. 1920년 앨리스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큰 작품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대신 새로 나온 녹음 기술에 관심을 가져 자기 곡을 직접 지휘해 많은 녹음을 남겼어요. 1924년 왕실 음악 감독이 되었고, 1934년 우스터에서 일흔여섯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음재에서 들을 수 있는 곡

  •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 「사랑의 인사」, 첼로 협주곡 4악장.

약혼 선물로 쓴 다정한 「사랑의 인사」, 친구를 그린 '님로드', 전쟁 뒤의 쓸쓸한 첼로 협주곡을 차례로 들으면 한 사람의 젊은 날부터 말년까지가 보입니다.

함께한 사람들

  • 앨리스 엘가아내이자 평생의 지지자.
  • 아우구스트 예거'님로드'의 주인공. 출판사 편집자로 그를 붙잡아 준 친구.
  • 한스 리히터「수수께끼 변주곡」을 초연한 지휘자.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엘가는 장사하는 집안 출신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종교도 주류와 달라 오랫동안 상류 음악계 밖에 있었습니다.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인정받았지요. 오늘날에도 출신 학교와 집안이 기회를 크게 좌우하곤 합니다.

학벌이나 집안이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되려면, 기회의 문은 어디서부터 다시 열려야 할까요?

엘가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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