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러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호숫가 숲속, 창문 몇 개와 피아노 한 대뿐인 작은 오두막. 해가 뜨기 무섭게 한 남자가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했고, 새소리마저 성가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요. 한 해 내내 극장을 이끌던 지휘자가 작곡할 수 있는 시간은 여름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말러입니다.
보헤미아의 소년
말러는 1860년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 칼리슈테에서 유대인 상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고, 곧 이웃 도시 이흘라바로 옮겨 자랐습니다. 형제가 열넷이었지만 그 가운데 여러 명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어요. 어린 시절 그는 군대의 나팔 소리와 행진곡, 시골 춤곡을 들으며 자랐는데, 이 소리들은 훗날 그의 교향곡 곳곳에 나타납니다.
빈 음악원과 지방 극장
열다섯 살에 빈 음악원에 들어간 그는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뒤 그는 작은 지방 극장의 지휘자로 시작해, 프라하,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 함부르크를 거치며 점점 큰 무대로 올라갔어요. 연습에 엄격하고 완벽을 요구하는 지휘자로 이름이 났지요.
빈 궁정 오페라
1897년 말러는 빈 궁정 오페라 극장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는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어요. 그 시절 빈에서는 유대인이 그런 자리를 얻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십 년 동안 그는 극장을 크게 바꾸었습니다. 공연 중에 늦게 들어오는 관객을 막고, 객석 조명을 어둡게 하고, 무대와 음악이 하나가 되도록 연출을 새로 했지요.
알마와 여름 오두막
1902년 그는 스무 살 가까이 어린 알마 신들러와 결혼했습니다.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뵈르터 호숫가의 별장에서 지내며, 숲속 오두막에서 교향곡을 썼어요. 교향곡 5번, 6번, 7번이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두 딸도 태어났지요.
1907년
1907년은 말러에게 잔인한 해였습니다. 큰딸 마리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무렵 그는 심장병 진단을 받았어요. 빈의 언론과 반대 세력의 공격 속에 그는 궁정 오페라 감독 자리에서도 물러났습니다.
뉴욕과 마지막
그 뒤 말러는 뉴욕으로 건너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했습니다. 여름이면 유럽으로 돌아와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을 썼어요. 1911년 뉴욕에서 병이 깊어진 그는 빈으로 돌아와, 그해 5월 쉰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에 그의 교향곡은 길고 낯설다는 평을 많이 들었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세계 곳곳의 오케스트라가 즐겨 연주하는 곡이 되었어요.
평음재에서 들을 수 있는 곡
-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현악기와 하프만으로 부르는 느린 노래예요.
말러의 교향곡은 대개 한 시간이 넘을 만큼 길고, 장례 행진과 시골 춤, 새소리와 나팔 소리가 한데 뒤섞입니다. 그는 교향곡이 세상 전체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해요. 그 거대한 교향곡 한가운데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아다지에토를 들으며, 그 앞뒤에 어떤 소란이 있을지 상상해 보세요.
함께한 사람들
- 알마 말러아내이자 작곡을 공부한 사람. 결혼하며 작곡을 그만두기를 요구받았다고 회고했어요.
- 브루노 발터젊은 지휘자이자 제자. 말러가 떠난 뒤 「대지의 노래」를 초연했습니다.
- 빌럼 멩엘베르크말러의 교향곡을 널리 알린 네덜란드 지휘자.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말러는 빈의 가장 높은 음악 자리에 오르기 위해 종교를 바꾸어야 했고, 그 뒤로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공격받았습니다. 일자리와 출세를 위해 자기 신앙이나 정체성을 감추거나 바꾸어야 하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지요.
어떤 자리에 오르려면 자기 신앙이나 정체성을 바꾸어야 한다면, 그 사회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요?
말러의 숨은 이야기
같은 시대를 산 작곡가
생애가 말러의 생애와 10년 넘게 겹친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