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소륵스키 이야기
1881년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군 병원. 화가 일리야 레핀이 병상에 앉은 한 남자를 그립니다. 헝클어진 머리, 붉어진 코, 실내 가운. 레핀이 이 초상화를 그리고 며칠 뒤, 그 남자는 마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이 그림은 지금도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가장 널리 알려진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골 영지의 소년
무소륵스키는 1839년 러시아 프스코프 지방의 시골 영지 카레보에서 귀족 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유모가 들려주던 러시아 옛이야기와 농민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어요. 이 기억은 평생 그의 음악 밑바닥에 흘렀습니다. 그는 일곱 살 무렵 이미 리스트의 쉬운 곡을 칠 만큼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요.
근위대 장교
그는 집안의 뜻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관 학교에 들어가 이름난 근위 연대의 장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교 생활보다 음악에 마음이 끌렸지요. 작곡가 다르고미시스키와 발라키레프를 만난 그는 1858년 군대를 그만두고 음악에 뛰어들었습니다.
'5인조'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한 젊은 작곡가 모임에는 무소륵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큐이가 함께했습니다. 이들은 유럽의 음악 학교식 규칙을 따르기보다 러시아만의 음악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어요. 훗날 이 모임은 '5인조'라 불렸습니다. 무소륵스키는 그 가운데서도 정식 교육을 가장 적게 받았지만, 누구보다 대담한 소리를 찾았지요.
농노 해방과 공무원 생활
1861년 러시아에서 농노 해방이 이루어지자, 농노의 노동에 기대던 그의 집안은 재산을 크게 잃었습니다. 무소륵스키는 생계를 위해 관청에서 하급 공무원으로 일해야 했어요. 낮에는 서류를 쓰고, 밤에 작곡하는 생활이었습니다. 1871년부터 한동안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한 방을 나눠 쓰며 지내기도 했어요.
「보리스 고두노프」
그는 푸시킨의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썼습니다. 러시아 말의 억양을 그대로 살린 선율과, 민중을 주인공처럼 무대에 세운 대담한 작품이었지요. 극장은 처음에 이 오페라를 거절했지만, 그는 고쳐 써서 1874년 마침내 무대에 올렸습니다. 같은 해 친구 하르트만을 기리며 「전람회의 그림」도 썼어요.
무너진 말년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술에 빠져 건강을 해쳤고, 공무원 일자리도 잃었습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지내다가 1881년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은 미완성이거나 정리되지 않은 채였고,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를 다듬어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다듬기 전 무소륵스키의 거친 원래 악보에 오히려 더 큰 힘이 있다고 다시 평가했지요.
평음재에서 들을 수 있는 곡
- 「전람회의 그림」 중 '키이우의 대문'친구가 설계했지만 지어지지 못한 성문을 소리로 세운 곡이에요.
원래 피아노곡이지만 라벨이 관현악으로 옮긴 판으로도 많이 연주됩니다. 두 판을 견주어 들어 보세요.
함께한 사람들
- 밀리 발라키레프'5인조'를 이끈 작곡가이자 스승 같은 친구.
-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한 방을 나눠 쓴 친구. 그가 떠난 뒤 작품을 정리했어요.
- 빅토르 하르트만「전람회의 그림」을 낳게 한 화가이자 건축가 친구.
- 일리야 레핀마지막 초상화를 그린 화가.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무소륵스키의 거친 악보는 그가 떠난 뒤 친구에 의해 매끄럽게 다듬어졌는데, 훗날 사람들은 원래의 거친 모습에 더 큰 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더 좋게' 고치는 일은 때로 그 작품의 개성을 지우기도 하지요.
남의 작품을 고치거나 다듬을 때, 원래 만든 사람의 목소리를 지키려면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같은 시대를 산 작곡가
생애가 무소륵스키의 생애와 10년 넘게 겹친 사람들









